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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의 우울과 한때 아이였던 보호자들」 55화 귀신도 울리는 흉계 본문

眠り姫の憂鬱とかつて子供だった護り人たち 번역

「잠자는 공주의 우울과 한때 아이였던 보호자들」 55화 귀신도 울리는 흉계

네츠* 2021. 3. 15. 20:24

원문 링크 : novel18.syosetu.com/n7091gi/56/

 

 

鬼をも泣かせる悪だくみ

 

 

 상태가 안 좋다.
 눈이 떠졌을 때, 처음 들은 생각이 그것이었다.
 몸 전체가 나른해서 무겁고, 전신이 투명한 진흙에 눌려지는 기분.
 숨도 쉬기 힘들고, 입 안이 말라 갈라졌다.

「……물, 마시고 싶네」
「사이드 테이블에 주전자가 있어」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와 나는 투명한 진흙을 밀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침대 위에 있고, 시선의 앞에는 쇠창살. 그 너머에는 레그너스씨가 있고, 그 등 뒤에는 긴 복도가 이어져 있다.
 뭐라고 소리치려고 해보았지만 몹시 목이 메어, 나는 당황해서 베드 사이드에 있는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집어 들고, 흠칫 한다.

 이 물에, 뭐가 타있으면 어쩌지.
 나는 신음하며 입 안의 침을 모아 삼킨다.
 그 정도로는 갈증이 전혀 가시지 않지만 독을 먹을 거라면 그게 어떤 독인지 정도는 알아두고 싶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레그너스씨는 「흐응」하고 무심한 소리를 낸다.

「경계심이 강하군. 하란이 한 말도 그리 틀린 건 아닌 것 같아」
「――하란?」
「가두어 둔다고 한들, 네가 그렇게 간단히 말을 듣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야」
「어째서 하란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아? 어째서……!」

 레그너스씨는 말없이 감옥 안에 “천으로 싼 무언가”를 던져 넣는다.
 하얀 천은 검붉게 변색된 무언가로 얼룩져 있다.
 나는 침대에서 기어 내려와, 조심스럽게 천을 연다.

「히……ㅅ……!」

 목이 마른 탓인지, 비명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단지 나는 입술을 꽉 물고, 이렇게나 수분이 없는데도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빠질 것처럼 그 손가락을 꼭 껴안는다.

「우는 건가…… 그런가…… 그렇다면 그 녀석은 거짓말을 하진 않았군……」
「하, 하란한테…… 그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이런 심한 짓을 할 수 있어!?」
「그 녀석이 난동 부리면서 내 코를 부러뜨렸다. ――그 손가락은 하란의 손가락은 아니지만, 네가 저항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손가락이든 팔이든 눈알이든, 여기에 보내도록 하지」
「우, 아……」
「물 마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향이 나는 과일 이외에는. 나는 컬렉션을 소중하게 다뤄. 너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도 원하고 있어. 네가 나를 따른다면, 네가 바라는 것을 주지」
「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나,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을 세 봐라. 식사는 하루에 두 번 날라줄 테니. 요망이 있다면 그것에게 전하도록 해. 나는 이 꼴을 어떻게든 하지」

 레그너스씨는 일어선다.
   “이 꼴”이라는 말 그대로 레그너스씨의 얼굴을 심하게 맞은 후인 양 부어 있다.
 하란이 한 짓인 걸까.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하란이 나를 위해서 이 사람과 싸워준 것인가. 그리고 잡히고 만 걸까.

 떠나가는 레그너스씨의 등과 내 손에 남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손가락을 본다.
 하란의 손가락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레그너스씨는 내 반응을 보기 위해서 누군가 죄도 없는 사람의 손가락을 잘랐다.

「――잠시만!」

 나는 일어나서 주전자에 직접 입을 대고 꿀꺽꿀꺽 물을 마신다.
 쇠창살을 쥐고 긴 복도를 힘없이 걷는 레그너스씨의 등을 불러 세운다.
 의외로 돌아봐준 레그너스씨에게 나는 손수건으로 싼 손가락을 내민다.

「우선 이 손가락을 자른 사람을 도와줘. 파스토르의 지인이잖아!? 파스토르라면 손가락을 붙여줄 수 있잖아!?」
「――그래서 너한테 무슨 득이 있지?」
「이득이라던가 손해라던가 관계 없잖아!? 됐으니까 해줘!」
「그래서 나한테 무슨 득이 있지」
「조금은 당신을 좋아해 줄게」
「그다지 이득인 것 같지 않군」
「이런 짓까지 해서 데리고 온 컬렉션이 상처 입는 게 보고 싶어?」

 레그너스씨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억지로 데리고 와서 가두고 순종적이게 만들려고 한다면, 가두어진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전자는 깨면 날카로운 유리가 된다.
 시트는 찢으면 끈이 된다.
 사방을 둘러싼 딱딱한 벽――그저, 내가 결의를 다지기만 하면 된다.

 레그너스씨는 무언으로 감옥 앞까지 돌아와 내가 건넨 천 꾸러미를 받아든다.
 깊은 한숨을 한 번, 그리고 「귀찮은…… 자르지 말 걸 그랬군」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웃는다.
 어떤 웃음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레그너스씨의 입에서 그 말을 꺼냈다는 것이 묘하게 기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너는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건가」
「얼굴도 이름도 몰라도 나 때문에 그 사람이 괴로워한다면, 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 정도는 이상한 게 아니잖아?」
「세간은 “미쳤다”라고 하겠지」

 레그너스씨는 맞아서 찌그러진 얼굴로 만족한 듯이 웃더니 약간 또렷한 발걸음으로 이번에야말로 지하 감옥을 빠져나간다.
 나는 갑자기 힘이 빠져 쇠창살에 매달려 주르르 주저앉는다.

「아ー……」

 쿵, 하고 쇠창살에 이마를 찧는다.
 쿵, 쿵하고 연속으로 부딪혀 어질어질해진 나는 벌렁 나자빠진다.
 돌멩이 위에 깔린 폭신폭신한 융단은 침대에 버금가는 느낌이다.
 이대로 잠든다면, 꿈 속에서 올빼미씨와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파스토르를 찾을 수 있는 걸까.
 쇠사슬을 더듬으면, 다른 모두의 꿈에도 들어갈 수 있는 걸까.

+++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이라고, 레그너스! 안 그래도 네 폭거 때문에 짜증나는데 왜 굳이 나를 부른 거냐! 올리를 돌려줄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널 독살할 거야!」

 방에 들어오자마자 불평을 늘어놓는 은발의 의사를 힘 없이 맞이하고 레그너스는 하란에게 맞은 얼굴을 가리키며 「어떻게든 해라」라고 쏘아붙인다.
 하지만 파스토르는 레그너스의 얼굴보다도 얼굴을 가리키는 손가락 쪽을 응시한다.

「……너, 새끼손가락 어디 갔어?」
「거기」

 레그너스는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내던져 있는 꾸러미에 시선을 보낸다.
 파스토르는 꾸러미를 열어 보고, 피투성이인 새끼손가락을 노려보며 「이쪽이 더 중상이잖아」라고 한숨을 내뱉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어떤 반응을 하는가 싶어서」
「――하?」
「그거한테 넘겼더니 퇴짜 맞았다」
「스스로 절단한 건가?」
「관절을 빼내면 그렇게 어렵지 않아. ――붙일 수 있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나는 올리가 너한테 능욕당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어」

 그러고보니, 그랬지.
 3일 안에 약을 만들어 오라고 전해뒀었다.
 레그너스는 생각한다.

「그건 이제 잊어도 돼. 평소처럼 원래 먹던 수면제만 가지고 와」
「뭐냐고 대체……!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됐으니까 손가락이나 붙여. 그렇게 하면 그게 조금은 나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 같아」
「올리를 개나 고양이처럼 부르지 마!」
「――너는 올리브를 올리라고 부르는군」
「그래서 뭐」
「아아…… 하란도 그랬지. 그런가…… 그럼 나도 그렇게 부르지」

 파스토르의 표정이 명백하게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진다.
 친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애칭인 거겠지. 그걸 레그너스가 부르는 것이 파스토르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하란과 올리의 이야기를 한 건가? 언제?」

 그게 걸리는 건가.
 레그너스는 하란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그 남자도 파스토르를 달가워 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흐응, 하고 레그너스는 무심한 소리를 흘린다.

「재미있네」
「언제 만났는데!?」
「방금. 낮에 식사를 했다. 요리사를 팔아줬으면 해서 말이지. 거절당했지만 가까스로 타협점을 이끌어 냈다」
「네놈――!」

 파스토르는 레그너스에게 달려들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축 늘어져 있던 레그너스는 이제와서 그걸 피하지 않는다.
 이미 하란에게 맞아서 너덜너덜하고, 새끼손가락마저 절단했다. 지혈은 했지만 피도 어느 정도 잃었다. 오늘은 이미 충분히 지쳐있다.

「하란한테 올리를 판 건가!?」
「그런 건 안 해. 그건 내 컬렉션이다. 아무한테도 안 줘」
「그럼 뭘……!」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오면 보여주지. ――너와 같다, 파스토르. 놀랄 일도 아니잖아?」
「거짓말이군. 하란이 “그걸”로 만족할 리가 없어. 그 욕심 많은 짐승이……!」

 흐응, 하고 레그너스는 또 소리를 흘린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두 사람의 관계가 깊은 것 같다.

「거래 내용은 이야기할 수 없어. 다만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고 손가락을 붙여준다면…… 그렇지. 약을 가지고 온 날은, 올리의 진찰을 너에게 맡기도록 하지. 가뒤두면 건강 상태가 걱정되니까 말이지」
「――농담이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파스토르의 표정이 굳어진다.
 창백하기까지 하다.

「하란에게도…… 그런 조건을 제시한 건가? 네가 원하는 걸 가지고 오면 만나게 해주겠다고 한 건가!?」
「내용은 말할 수 없어」
「“그래서” 손가락을 절단한 건가?」

 레그너스는 무심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놀랐다.
 손가락을 절단한 것과 하란과 거래를 한 것――그것만으로, 파스토르는 거래 내용을 추측한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건 맞았다.

「하란의 손가락이라고 속이고 올리에게 그걸 보여준 건가? 그 녀석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복종하라고 협박한 건가!? 그러면 복종할 거라고, 그 녀석이 너한테 말한 건가!」
「넌 현명하군, 파스토르」
「하란……! 그 비열한 자식! 내가 죽여 뒀어야 했다……! 그 때 죽이고 올리의 기억에서 지웠어야 했다!」

 레그너스의 몸을 뿌리치듯이 내팽겨 치고, 파스토르는 초조한 듯이 방을 돌아다닌다.
 말을 걸지 않은 채 보고 있으면 파스토르는 「아니, 안 돼 죽이면 올리가……」라던가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잠들어 있는 편이……」라던가 중얼거리고 있다.

 그리고 레그너스의 곁으로 돌아와 절단된 손가락을 집어 든다.

「이걸 붙이는 데에는 특별한 설비가 필요하다. 꿰매기만 하면 썩을 뿐이야」
「그런가. 뭐가 필요하지?」
「간단히는 준비할 수 없어! 내 연구실이 있는 이스쿰에 가던지, 그렇지 않으면――」
「이 저택에 설비를 만들던가?」

 파스토르는 얼굴을 찡그린다.
  분명 「그런 거 만들 수 있을 리가 없다」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이 저택에 파스토르의 연구실을 만드는 건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일일이 부를 필요도 없어지고, 장사도 되겠지.

「필요한 걸 필요한 만큼 준비해라. ――그렇게 하면 올리의 감옥 옆에 네 연구실을 만들어주지」
「……뭐라고?」
「아아――기분 좋군」

 레그너스는 천장을 바라본다.
 오늘 아침, 올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지금, 파스토르가 손에 들어온다.

 파스토르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우뚝 서 있다.
 레그너스는 이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
 비뚤어진 성격에, 유능함과 바닥을 치는 자기 긍정감을 가득 담은, 타인에 대한 모멸과 불신감.
 두려운 게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나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있다.

 파스토르는 올리를 버릴 수 없다.
 버릴 수 없는 사람을 장악한 레그너스에게 거역할 수 없다.

「마음에 드는 것을 한 쌍으로 키워 각각 아내와 의사의 옷을 입혀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네가 내 것이 된다면 하란은 죽여도 돼. 그 녀석이 싫은 거잖아?」
「……이미 하란을 붙잡은 건가? 지하실에?」
「지금은 아직」
「그럼…… 그 녀석은 돌아간 거군. 올리를 두고」
「그것도 나름대로 일그러져 있어 재미있다만 컬렉션에 추가할 정도는 아니야. 너와 달리 저택에 둬서 도움이 되는 타입도 아니야」
「그런가……」

 파스토르는 가방에서 병을 꺼내더니 레그너스의 손가락을 어떤 약액 안에 던져 넣는다.
 치료 도구를 꺼내 레그너스의 손가락의 단면을 지혈한 뒤 마지막으로 얼굴을 치료한다.

「――만약 지금 내가 조금 손을 미끄러뜨리면, 이대로 너를 죽일 수 있군」
「내가 죽으면 지하는 불타게 되어있다. 소사체를 가지고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좋아서 살아있는 게 아니야」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 흥미는 있나?」

 기묘한 질문에, 레그너스는 졸린 듯 감았던 눈을 뜬다.
 파스토르는 차가운 눈으로 레그너스를 내려다본다.
 일순, 섬뜩했다.
 아까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서 있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 아마, 무언가를 정했다.
 이 질문의 대답을 틀렸을 때, 레그너스나 파스토르, 누군가가 죽겠지.
 잠들어 있는 올리에게, 흥미가 있는가.
 레그너스는 생각한다.
 25년 동안 잠들어 있던 소녀를, 다시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방법을 파스토르는 알고 있는 것이다.

 레그너스는 입을 연다.
 그 입에, 파스토르가 다섯 손가락을 비집어 넣어, 입 안에서 주먹을 쥔다.
 턱이 빠질 듯한 감각과 입에 넘치는 피의 맛――레그너스의 이가 파스토르 주먹의 피부를 뚫고 있다.

「정답을 말하려고 하지 마. 거짓말은 알아챌 수 있어」
「응……」

  꿀꺽하고, 레그너스는 목을 울린다.
 입에 흘러들어온 파스토르의 피를 삼킨 것이다.
 쇠 냄새가 나고, 꺼슬꺼슬해서, 도저히 맛볼 만한 게 아니다.

 레그너스는 무언으로 파스토르의 눈을 본다.
 파스토르는 그 시선을 받고 조용히 「그런가」라고 중얼거린다.

「올리와 함께라면 너에게 길러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지. 나와 둘이서 길러진다고 해도 올리는 딱히 기뻐하지 않아」

 파스토르는 레그너스의 구강에서 손을 끄집어 내고 재빨리 짐을 정리해 서둘러서 방을 나섰다.
 레그너스는 입에서 넘친 파스토르의 피를 닦고 파스토르의 질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깨어나서 움직이고 있는 올리는 바라보고만 있어도 나름대로 유쾌하다만, 잠든 채 늙지 않는 소녀는 수집품으로서 훌륭하다.
 올리가 다시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해서, 놓아준다는 선택지는 없겠지.

――그 녀석을 죽이면, 올리가.

 파스토르의 혼잣말을 떠올린다.
 레그너스는 또 다시, 「흐응」하고 소리를 올린다.

「누군가를 죽이면, 올리는 다시 잠드는 건가……?」

+++

 ――완전히 늦고 말았다.

 레그너스가 갑자기 부른 탓이다.
 레이나를 심부름으로 보냈으니까 비스크 일행에게 사정은 전해져 있겠지만――.
 저택을 나오자마자 마차를 잡고 파스토르는 하란의 상관으로 향한다.
 미행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런 건 없는 것 같고, 있다고 해도 레그너스와 하란에 대해서 이야기한 뒤에 상관으로 향한다고 해도 아무런 위화감은 없겠지.

 모르는 척 하자.
 파스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다. 하란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즉 이건 “그런 거”다.

 열린 문을 통과하자 레이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마중 나온다.
 하란 일행은 식당에 모여 있다고 한다.

「……그 녀석은 아무 말도 안 했나? 레그너스가 있는 곳에 갔던 건에 대해서」
「그게, 아가씨와 만났다고 하셨어요……! 게다가 정기적으로 아가씨와 만날 약속까지 받아냈다고!」

 순간, 파스토르는 자신의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감정이 「싫어하는 상대를 배제할 정당한 이유를 잃은 것에 대한 실망」이라고 깨닫고, 파스토르는 자조의 웃음을 띄운다.

「왜 웃고 계신 겁니까?」
「딱히――그저 나는 조금 더 깊이 있는 타진을 받았기에, 우월감에 젖어 있어」

 레이나와 걸으며 식당에 발을 들여놓고, 파스토르는 상당히 오랜만에 예전 지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에 메스꺼움과 같은 괴로운 감정을 느낀다.

 비스크와, 그로우.
 그로우와, 하란.
 하란과, 파스토르.

 손 쓸 수도 없을 정도로 맞지 않는데, 한 방에 모이고 말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앞지르는 것도 독점도 없다.
 그게 무척이나 답답하다.

「――레그너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혼자서 이겼을 텐데 손익 계산 기능마저 고장난 건가? 아니면 특기인 제정신인 척 하긴가?」
「네가 레그너스에게 불렸다는 걸 몰랐다면 다물고 있었을지도. 그리고, 내가 다물고 있으면 너도 다물고 있을 거잖아? 레그너스에게 무슨 말을 들었지?」
「전속 의사로서 올리와 함께 길러주겠다는 말을 들었어. 승낙하면 하란을 죽여도 된다고도 말이지」

 하란의 눈은 분노와 증오로 불타고 있다.
 저건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허세인가――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다.
 파스토르는 긴 테이블의 구석 자리에 앉는다.
 정면에는 비스크가 있다. 하란은 비스크의 대각선 앞에 앉아있고, 위험한 눈을 한 젊은 남자를 거느리고 있다.
 그로우는 벽에 등을 기대어 선 채.
 레이나는 왠지 파스토르의 등 뒤에 서 있다.

「다 모였으면, 시작하지」

 비스크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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